요즘은 금요일이 되면 일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주 내내 고민하며 정해둔 특별식(?)을
요리하거나 주문해서 차가운 맥주와 함께 먹는다.
그리고 주말 내내 보통 몸에는 안 좋지만
너무 먹고 싶었던 음식들을 대부분 고민 없이 사고, 먹는다.
오늘은 어쩌다 생긴 작은 라클렛용 감자를 삶아서
마트에서 사 온 gruyere 치즈와 하몽을 얹어서
간단한 오븐식 라클렛을 해 먹었다.
냉장고에는 어제 와인 전문점에서 산
맛있는 화이트 와인이 있어서
같이 마실까 하다가 참았다.
다 먹고 나서는 산책 겸
rosenthalerplatz 쪽으로 걸어갔다가
그동안 가보고 싶다고 생각만 했던
고기, 치즈 전문점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찾아다녔던 guanciale를 샀다.
제대로 된 까르보나라를 만들려면
필요한 고기인데
베를린에서는 찾기가 힘들어서
이탈리아인 친구한테 물어봐도
자기도 베를린에서 파는 거 못 봤다 해서
그래서 포기하고 있다가
어쩐지 guanciale를 팔 것만 같은
힙한 고기, 치즈 전문점을 발견하고
눈도장을 찍어뒀었다.
역시나 가게 입장을 하자마자
guanciale가 떡하니 있는 것.
힙한 가게라 가격도 힙하겠거니 하고
슈퍼마켓이었다면
용감하고 당당하게 200그람 주세요! 했겠지만
수줍게 100 그람만 주세요! 했다.
사진에 보이는 귀여운 사이즈의 고기가 그 결과.
집에 와서 냉장고를 열고
화이트 와인과 gruyere 치즈와 guanciale를 보니
참 잘 먹고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인과 치즈는 한국에 비하면 이 곳에서는
그다지 비싸지 않다.
비싸고 좋은 것도 당연히 많겠지만
우리가 먹고 마시는 건 주로 그렇지 않다.
그래도 냉장고를 열면
각종 싱싱한 채소가 가득하고
심지어 그걸 다 못 먹고 버리기도 하고
13 유로나(!) 되는 화이트 와인과
맛있는 치즈, guanciale까지 들어있는
냉장고를 보니 풍족한 삶이구나 싶었다.
오 년쯤 전에 베를린에 왔을 때는
정말 돈이 없었다.
오 개월 동안 밤마다 울면서
이력서를 돌린 끝에 인턴 자리를 하나 얻었다.
나는 그때도 이미 삼십 대였는데
같이 인턴을 시작한 독일인 친구 중 하나가
나 벌써 스물여섯인데 겨우 인턴이네 라고 해서
유럽 사람들은 나이 같은 거 상관 안 하는 줄 알았는데
하면서 놀라고
삼십 대에 겨우 인턴 하는 나도 있는데
하면서 속으로 삐졌다.
월급은 당연히 귀여운 인턴 월급이라서
월세 내고, 100유로를 공동 식비로 내고
얀과 만나서 가끔 싼 식당에서 외식하고
통신비(월 1만 원), 헬스장비(월 2만 원)
엄마한테 빌린 돈 조금씩 주고
그러고 나면 정말 남는 게 없었다.
인턴 다음으로 얻은 주니어 포지션에서도
연봉을 낮게 불러야 뽑히고
그래야 비자 서포트를 받을 수 있겠다 싶어,
인턴 월급 정도를 내가 불렀기 때문에
거의 2년 동안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당시에 스튜디오에서 일하던
얀 월급은 내 월급보다 훨씬 낮아서
결국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일반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지만 학자금 대출 갚고 그러느라
우리는 항상 돈이 없었다.
식당에서 맥주를 시킬 때마다
눈치 주는 얀에게 크게 화낸 적이 있다.
얀은 식당에서 절대 물도 안 시키고 참았다가
다 먹고 나서는 밖에 나와서 마트에서
물을 사서 벌컥벌컥 들이켰는데
그것도 너무 초라한 것 같고 꼴 보기 싫었다.
우리가 가끔 가는 식당들은 대부분
싸구려 베트남 음식점이었는데
그런 곳에서 물이랑 맥주 시켜봤자
2-3유로 밖에 안 하는데 그걸 참는 게
이상하게 서러웠다.
이제는 둘 다 직장을 몇 번 옮겨서
연봉도 올랐고, 경력도 생겼고
독일 생활에 조금은 익숙해져서
어떻게 돈을 아껴야 하는지 알게 됐다.
월세도 운이 좋아서 상당히 싼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어서 여기에서 아끼는 돈이 많다.
벌이는 더 나아졌는데, 고정 지출이 줄어들어서
예전보다 우리 살림살이는 훨씬 나아졌다.
이제는 식당에서 얀도 나도 큰 부담 없이
물도, 맥주도 시키고
식재료를 사는 데에는 많이 아끼지 않는다.
돈이 진짜 진짜 많아지면
누릴 수 있는 게 많아지니까 좋겠지만
그 모든 것들을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가는
또 다른 문제다.
솔직히 돈이 정말 많아진다고 해도
내가 갑자기 호화 크루즈 여행을 가거나
테슬라를 사거나 그러진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돈을 더 벌어두고 싶은 이유는
나이 들고 늙어서도 얀과 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서 맥주 한 병 더 시킨다고 싸우지 않고
품질 좋은 식재료를 고민 없이 사서
집에 돌아와 함께 요리하고 싶어서다.
이제는 물 한 병, 맥주 한 병 시키는 문제로
절대로 얀과 싸우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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