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베를린의 아름다운 여름도 끝난 것 같다.
대부분의 유럽 도시들처럼, 베를린의 여름은 길고 힘들었던 겨울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눈부시고 싱그럽고 러블리하고 막 그렇다.
라이프 이즈 뷰티풀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이 여름이 길어봤자 삼 개월 남짓이라는 것이 함정.
나머지 구 개월은 축축하고, 눅눅하고, 우울하고, 어둡고 막 그렇다.
유럽 생활이 길면 길어질수록 이렇게 여름의 끝에서 해가 짧아지고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좀 두려워진다.
이제 또 내년 여름이 올 때까지 어떻게 버틸까.
9월이 되자마자 독일 상점들이 거의 바로 크리스마스 관련 용품들을
팔기 시작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이제부터는 날이 짧아지고, 추워지고, 우울해지는 일만 남았고
그나마 기다려지는 건 크리스마스.
확실히 찬 아침 바람을 맞으면서 커피를 만들다가
벌써 크리스마스를 생각하고 있는 내가 제법 유럽 짬밥 있어 보여 웃겼다.
이 구 개월을 버티는 게 정말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일 년의 삼분의 일.
긴 긴 겨울을 지나면서 이미 실망할대로 실망한 독일의 시스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따끈한 국물, 찌개 생각이 굴뚝같아도
당장 먹을 수 없어서 힘들어하는 날들이 곧 다시 올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살고 있는 한 아마 매 년 반복되겠지.
얀과 나는 내년에는 꼭 베를린을 떠날 계획을 하고 있다.
일단은 상황을 봐서, 삼 개월정도 아시아에서 살면서 일하고 싶고
삼 개월이 지나면 마음을 정하고 베를린에 올 예정이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아무리 독일 시스템을 욕하고 사람들과 친해지지 못해도
독일에 있을 것인지 완전히 나라를 바꿀 것 인지.
뭐가 되었든 베를린은 떠나려고 한다.
베를린에 처음 왔을 때는,
그 때의 우선순위는 일단 커리어를 시작하고 싶었고,
그 커리어를 한국에서가 아닌 외국에서 시작하고 싶었다.
영어를 쓰면서 일하는 것이 어릴 때부터 꿈이었는데
한국에 있는 외국계 기업을 고려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해외에서 도전해보고 싶어서 무작정 나왔다.
그때는 우선순위라고는 오직 그것 하나였다.
6년이 지나고, 새로운 가족이 생기고 직장생활이 길어진 지금
우선순위가 물론 그 전과 같을 수 없다.
현재 우선순위들은
첫째, 세금 좀 덜 내고 싶다. 아니면 세금을 내되, 미래 걱정을 덜 하고 싶다.
유럽 세율 높다 이야기만 들었지 정말 내 통장에 찍히는 금액을 보면 놀랍다.
40% 정도 세금을 내고 있는데 그러면 예를 들어 월 250만 원으로 회사와 계약을 했는데
통장에 들어오는 게 150만원이라는 말.
여기에서 공부를 한 적도 없고, 아기를 여기에서 낳을지도 모르겠고,
공적 연금 시스템은 너무 불안정하고 보장 금액도 너무 적어서
연금 보험을 사적으로 꼭 들게 하려고 정부가 여러 가지 서포트를 해주는 모양이다.
이렇게 높은 세율로 세금을 내고 있는데 거기에다 사적으로 연금 보험까지 부어야 하면
밖에 나가면 모든 게 비싼 독일에서 도대체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둘째, 인간관계와 생활이 조금 더 편했으면 좋겠다.
얀과 나 둘 다 독일과 독일어에 대한 애정이 없고
어쩌다 보니 베를린에 온 사람들이라서 독일어 실력이 항상 제자리.
독일에서 사니까 생활의 많은 부분이 독일어로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을 불평할 마음은 없다.
단지, 둘 중의 하나라도 의사소통이 좀 더 자유로운 나라로 가고 싶다.
그리고 사람들이 좀 친절했으면 좋겠다.
독일어를 못하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 때가 있는데
전반적으로 너무 불친절한 직원이나 사람들 때문에 주눅도 들고 화도 나기도 한다.
독일 사람들은 친해지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 번 친해지면 영원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친해지기가 나에게는 너무너무 어렵다.
사실, 처음 친해지기 어렵지 그 단계를 넘어서면 둘도 없는 관계가 되는 건
어느 나라나 비슷하지 않나?
나에게 독일인들은 전반적으로 그 허들이 훨씬 높은 것 같다.
셋째, 가족을 꾸리고 살기에 좋은 곳이었으면 한다.
이제 정말 아기를 낳고, 집을 장만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는데
아기를 베를린에서 낳아서 키우고 싶지 않다.
위험한 곳이 많고, 교육의 질도 내가 원하는 것보다 훨씬 떨어진다.
좋은 교육을 위해서는 여기에서도 교육비가 많이 든다 한다.
베를린의 집 값도 요즘에 너무 많이 올랐고,
오래된 집을 사면 집을 소유하고 있는 한 매달 꼭 내야 하는 하우스겔트가 또 부담이고
새 집을 사자니, 안전하고 좋은 지역은 너무 비싸다.
세금을 40%를 내는데 연금 보험도 따로 부어야 할 것 같은데
다들 어디에서 돈이 나서 이런 집들을 사는지 모르겠다.
이걸 다 충족하는 곳이 우리에게는 탈린 또는 헬싱키이긴 한데
날씨가ㅠ 두 곳다 날씨가 너무 하다.
북유럽 날씨를 잘 아는 얀이 에스토니와와 핀란드의 겨울을 너무 두려워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떠나온 한국도 집 장만을 제외하면
이제 내 우선순위에 부합하는 곳이다. 심지어 날씨도 나쁘지 않다.
어디가 되었든 이제 독일이 마음에 없다는 건 확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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