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마케터, 혹은 퍼포먼스 마케터로 6년 가까이 일해왔다.
여러 분야의 다양한 규모의 회사에서 일하면서
어떨 때는 회사의 모든 일을 떠맡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양한 부서, 특히, BI와 IT 그리고 세일즈 팀까지 아우르며 일하기도 했고
현재는 규모가 상당히 큰 팀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 담당하면서
로보트처럼 같은 일만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하며 일하고 있다.
이전 회사에서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입사했다.
하지만, 회사 사이트를 새로 만드는 것에서부터 데이터 적재를 위한 모든 셋업을 하고
인터뷰를 바탕으로 웹사이트의 UX, UI의 개선 방향을 잡는 동시에
본업 (?)인 마케팅 캠페인까지 관리를 하는 것이 너무 벅찼다.
알고 있는 것이 많다고 자만하고 있었던 상태였는데
인력과 budget이 부족한 상태에서 많은 것들을 바닥부터 시작하려니
아는 것도 없고 의지도 꺾여서 결국 이직을 선택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업무 스타일이 다른 팀장과 1년 내내 코로나로 삭감된
월급을 받으면서 동료들이 해고당하거나 떠나가는 것을 보는 것도 힘들었다.
그렇게 옮긴 현재 회사는 마케팅 데이터만 따로 관리해주는 큰 팀이 있고,
더 큰 프로덕트팀이 있어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모든 셋업이 되어 있고
데이터가 수시로 업데이트 되어 들어오고,
프로덕트 팀은 이를 바탕으로 서비스를 업데이트한다.
그 과정에서 내가 하는 일은 마케팅 채널을 다각화하고,
그 안에서 또 여러가지 캠페인을 테스트하고, 퍼포먼스가 좋은 캠페인들을 scale up 하는 것.
계속해서 반복되는 수동적 업무에 지치고, 이걸 자동화하거나 더 발전시킬 방법은 없나
고민할 시간 없이 몰아치는 업무들 사이에서 사실 많이 지치고 낙담했었다.
기계처럼 캠페인 셋업과 테스트, 스케일을 반복하면서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되는 일들에
안주하기도 했었고, 더 이상 발전 기회를 주지 않는 회사를 떠날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그만 두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최근, 많이 강해졌다.
나는 정말 일을 어중간하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고 지금도 그러고 싶지 않다.
나는 주어진 캠페인 관리만 하는 마케터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지는 이 데이터가 어떻게, 어떤 원리에 의해서 적재되는지
그리고 그 데이터를 제대로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마케터,
아직도 끊임없는 마케터의 manual work를 자동화시킬 수 있는 마케터
그리고 서비스를 제대로 이해하는 마케터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에 솔직히 더 높은 연봉을 받고 싶다는 바람이 더해져 점점 스킬에 집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려면 SQL이나 R이 필요할 거야
나에게 없는 스킬들이 필요하겠지, 하다못해 엑셀 function을 하나 더 알면 유용하겠지
그리고 그런 스킬들을 가진 마케터는 시장에 많이 없으니까
독일어가 부족해도 더 높은 연봉을, 더 높은 자리에 갈 수 있게 되겠지
그렇게 나에게 없는 스킬에, 독일어 실력에 집착하고 있었나 보다.
지난주에는, 오랜 시간 팔로우했던 어느 블로그 이웃님과
커피 챗이라는 서비스를 통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것 같은데, 비슷한 경력을 가진 것 같은데
나보다 훨씬 깊이 있는 배움과 마케팅 비전을 가졌다고 추측되던 분.
한국 시간 오후 6시, 독일 시간 오전 10시. 주어진 시간은 20분.
질문 몇 개를 준비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이 짧은 20분은 아마 최근 몇 년 안에 했던 대화 중 가장 기억에 남을 대화.
"앞으로 혹시 더 배우고 싶은 스킬이나 업무 능력이 있으세요?"
SQL도 R도 파이썬도 할 줄 아시는, 내가 가지고 싶은 모든 스킬을 습득하신 이웃님이셨다.
그러니까 나는 당연히 앞으로 더 배우고 싶은 스킬이 있으실 거라 짐작했다.
"저는 공부해야 하는 스킬이 딱히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때 그 때 서비스를 더 향상시키는 방향을 찾고, 그에 필요한 것들을 하다 보니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공부하고 배우게 되었어요"
누군가는 모범 답안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런 대답을 처음 들었다.
나도, 그렇게, 그런 마음으로 일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20분이 지나고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할 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이 서비스를 20분으로 제한한 이유가 있을까?
이런저런 테스트 끝에 20분은 중요한 포인트를 짚어내기 충분한 시간,
잊고 있었던 중요한 무언가를 상기시키기 충분한 시간임을 알게 된걸까?
그랬다.
짧다고 생각했던 20분 내에 나는 궁금한 모든 것을 물을 수 있었고
뭐가 진짜 중한지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때 그때에 필요한 것들을 하다 보니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고
무척 겸손하게 말씀하셨지만
그때 그때 요구되는 것들이 많아지는 상항 속에서는 도망치기도
쉽다는 것을 경험으로 안다.
이제는 큰 회사에서 일하게 되어 나에게 요구되는 직무의 범위가
상당히 좁지만 그래도 조금 더 큰 그림을 보는 법을 잊지 말자고 다짐한다.
'Berlin > Berlin_work'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일 직장에서 정치질 한복판에서 울었다. 따돌림도 당해봤다 - 1 (1) | 2023.04.19 |
---|---|
나에게 좋은 리더란 (0) | 2023.03.13 |
[독일 직장생활] 스타트업 선택하기 - 어떤 규모의 회사가 좋을까 (0) | 2021.06.14 |
[독일 직장생활 - 이직] 4번의 인터뷰와 1번의 케이스스터디 (1) | 2021.03.23 |
[독일 직장생활 - 단축근무] 단축근무라는데 단축근무 같지 않은 이 느낌은? (0) | 2020.12.12 |